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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자아로서 선과 빛

 

퍼블릭아트_서정임기자

 

 

이재윤전_ 1.28~2.10_ 페이퍼 가든

 

 

 인간에게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며, 그를 결정하는 신은 존재치 않기에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은 스스로

인간의 정신을 개별적인 것으로 보아 개인의 주체성이 진리임을, 인류는 개별적인 '나'와 '너'로 형성되어 있다 이는 모두 무신론적 실존주의 샤르트르의 주장으로 이재윤 작업 외면뒤에는 이와 같은 휴머니즘을 바탕에 둔

실존주의적 입장이 전제되어 있다.  그의 작품을 단편적으로 살펴볼때는 선의 다양한 실험으로 획의 맛을 살리는

것에선 동양의 서체를, 물질을 계속 비워내고, 채우기를 반복하는 것에선 미니멀리즘을, 부단히 색료를 무화시켜나가는 모노톤은 한국의 모노크롬 화를 떠오르게 한다. 물론 그의 작품이 이러한 개념의 영향에서 자유롭다고는

하기 어렵다. 하지만 작가는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세월의 깊이가 새겨진 암각화에서 드러난 선의 흔적 등에서 그 기원을 찾고 점차 진행되어온 전통들을 흡수하며 자기식의 표현을 찾고 있다. 이러한 방법들은 일견 주술적이기도 하거니와 삶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 사용되곤 한다. 그의 작품이 때론 구상성을 띠기도 하지만, 대체로 긋거나 붙이는 행위를 통해 표현되며 행위의 결과는 선에 집중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가 주로 탐구하는 선은 실존에 바탕을 두고 사유하고 행동하는 근원이며 자기 자신에 관계되면서 또한 그 가운데 초월자와 관계되는 것, 즉 고림이 아닌 다른 실존과의 관계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간 쌓여진 작품들은 한 개인의 회화사를 보여주는 듯하며 마치 자서전 혹은 일기장과 같은 형태를 취한다. 같은 맥락에서 근작들은 공간의 깊이와 움직임을 수용하기 위해 캔버스 내부에 고정되어 있는 박제된 선을 해방시켜 외부와 소통시키는 방법으로써 빛을 활용하는다양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앞으로 사진 매체에

자연의 빛을 담아 건축 공간에 반사된 빛과 선을 대입하는 실험을 할 것이라니 이로써 인간의 실존을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할지 기대가 크다.

 

 

 

 

 

 

 

 

 

 

 

 

 

 

 

 

 

 

 

 

 

 

 

 

 

 

 

 

 

 

 

 

 

 

 

 

 

 

 

 

이재윤 -인간의 내면성에 덧칠된 예술적 행위와 공간

                                                      

2008. 9  –퍼블릭아트 선정작가 –배세은 기자

          

 

 

   인간의 삶은 외부 세계와의 갈등으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고 궁극으로 본인의 자아에 대한, 혹은 인간성 자체에 대한 긍정을 회복하는 과정이라 할수 있다. 물론 사회적 상황이나 개인적 기질에 따라 자신이 처한 사회적, 심리적 현실에 대해 불만을 갖고 스스로의 무력함에 비관하며 이를 회피하거나 냉소적 태도로 일관하는 삶도 없진 않다. 그런 이유로 일부 예술가는 감정의 바닥을 치는 처절한 비애감을작품에 그대로 표현해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내고, 위안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구도자적 위치에 서있는 예술가들(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은  정신적 진보의 선두에 예술가가 서 있다고 했듯이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이를 자처하는 예술가들은 숱하게 많다. 삶의 진실에 대한 열망, 그 희망의 끈을 쉽사리 놓지 않는다. 그들에게 시련이란 오히려 작가로서의 길을 빛나게 하는 계기이며 현실과 사진의 사명을 단단하게 연결시키는 동아줄 같은 것이다. 작가 이재윤의 작업 배경이 그러하듯 말이다.

 

  “캔버스 위에 모든 것을 담으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의 태도와 자세”라고 말하는 그는 화면속에 구체적인 형상을 담거나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찬양을 늘어놓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침잠되어 있는 세계를 매우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조형을 통해 발현시키는 것을 더욱 중요시 여긴다. 실제로 그런 차원에서 어쩌면 그는 “진정한 회화는 양심의 문제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진실로부터 그림을 그린다.(클리포스 스틸(Clifford Still 1904~1980)"라는 주장 하에 미술가 개인의 깊은 내면에 초점을 둔 고도의 심오한 회화를 창조했던 추상표현주의의 화가들을 흠모했을지도 모른다. 행위를 예술로 끌어들이며 시대를 가로질렀던 그들의 작업과 공통점을 발견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재윤의 작업들은 거칠게 물감으로 점칠된 물성 가득한 화면이 아닌 손에 잡히지도 않는 여백을 채운다는 점에서 다르다. 공간을 공간으로 내버려둠으로써 오히려 꽉 찬 생동감을 선사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작가 작업의 특징임에 틀림없다.

 

  비우기를 통해 동양적 여백의 아름다움을 살리는 방식, 상승과 하강의 남성적 성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수직적 구조가 아닌 여성적이고, 온화한 감성을 전달하는 수평구도를 선호하는 그의 작업들은 오늘날의 자신만의 표현을 구축하고 있음을 추측케 한다. 그는 구상적 표현과 거리를 두고 기본적 형태에 집중하면 할수록 이를 이루는 근본에 대한 탐구의 열의를 강하게 보이며 특히 선(線)과 점(点)의 움직임에 몰입해 왔다. 선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공간, 그리드를 형성하고 있는 점, 때론 무의미하다 싶을 정도로 깊이 배어든 공기는 서사적이며 독백처럼 읽혀지기에 충분하다. 초기 그의 작업들은 마티에르가 강하게 느껴지고, 화면이 꽉 찬 느낌을 전한다면 오늘날의 작가는 언어의 과함을 넘지 않고, 시원한 공간 위에 자신있는 붓질로 안정된 선과 점을 운용한다. 과거의 작업과 달리 근작에 올수록 많은 것이 축약되고 생략되고 있는 셈이다. 캔버스 내에 모든 것을 집어넣기 보다는 내면의 소양을 바탕으로 비우기의 채움을 통해 더 응축되고 집약된 메시지를 전달할수 있다고 본다. 역시 서구의 추상표현주의적 관점과는 다른 동양적 사고임에 분명하다.

 

  이재윤 작품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는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과 자답에 있다. 그런 이유로 작가들은 모두 자신을 비롯한 인간에 대한 탐구의 과정, 즉 인간과 사회,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등의 관계 속에 발생하는 만남, 사건, 사고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야 하는 실존적 자아의 치열한 고민의 과정이며 동시에 깨달음의 결과물이라 할수 있다. 물론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치열함을 캔버스 위에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소란스러움이 아닌 정제되고 함축된 회화적 표현에서 오는 평정(平靜)의 느낌으로 이해하는게 옳다. 점, 선, 면 그 사이를 질주하며 일정한 질서 속에 녹아있는 절제된 조형성을 때로 사회적 관계 속에 침묵이 더 강한 의사 표명의 수단이 되듯 조용하지만 큰 울림을 선사한다. 우리가 그의 그림을 접하며 무언지 모를 감성적 공감을 체감하는 것도 마음의 갈등과 번민을 다스리며 진실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관자에게 적절히 전달되는 까닭에서이다. 폭풍이 지나가고 난 후 맑게 갠 하늘과 더 깊고 푸른 빛을 띠는 물의 잔잔함에서 오는 평온함, 삶속에서 존재하는 수많은 만남과 그 드라마 같은 사연속에 발생하는 오염된 감정의 정화와 치유, 작가 이재윤은 이러한 인간 본질과 내면성에 행위를 덧칠하고 공간을 입힘으로써 숭고한 예술적 행위를 창조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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